사도행전9:1-16
부르심으로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박해의 중심에 열혈 유대교 신자였던 청년 사울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8:3절을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우리말 ‘잔멸하다’로 번역된 ‘뤼마이노마이’는 포도원에 뛰어든 멧돼지가 포도원을 마구 짓밟아 온통 쑥대밭을 만드는 형국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남녀노소,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아예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사울 이야기가 다시 거론되는 9장1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오늘 우리가 읽는 한글성경에는 번역이 빠져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은 본 절의 서두에 ‘그러나’를 의미하는 접속사 ‘데’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본문 1절은‘그러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는 앞뒤의 내용이 서로 상반될 겨우 그 사이에 붙이는 접속사입니다.
9장 이전의 내용은 2천년 교회 역사상 최초로 사마리아 성을 복음화시키고, 이방인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빌립의 활약상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그런 빌립이 위대한 전도자의 길을 걷던 바로 그 순간에도 사울은 여전히 박해자의 길을 걷고 있었음을 대조하여 강조하기 위하여 ‘그러나’로 9장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것에 열중하는 상태, 또는 어떤 것에 의해 고무된 상태’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사울이 교회에 대해 가졌던 최악의 적대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의 감정을 폭력적이었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믿음을 말살하려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사울의 적대감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말살하는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한 박해를 다른 지역에까지 확대해 나갔습니다.
1-2절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다메섹, 즉 다마스쿠스는 현재 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213키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그때 당시 로마제국에 속해 있던 이곳에 약 4만명의 유대인과 3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교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떠난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사울이 알게 된 후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받아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마저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기 위해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주의 제자들’이라는 말이 있고, 2절에 ‘주의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말인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말씀을 배우거나 성경 지식을 학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혹독한 박해를 당해야만 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느라 삶의 터전인 예루살렘마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 길을 걷다 돌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길을 포기하라고 하지만 이들은 어리석게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미련하게도 꿋꿋하게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곧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통해서만 저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14:12절을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걸 바꾸면 이렇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하며 그릇되어 보이지만 필경은 생명의 길이니라’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라는 사실을 믿고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오늘도 묵묵히 주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찬양)
그러나 사울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내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전략은 완벽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앞에는 무지한 것이며, 결국 질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울을 사단의 적으로 두는 것입니다.
여러분! ‘회심’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국어사전을 보면
1. 마음을 돌이켜 먹음.
2. 과거의 생활을 뉘우쳐 고치고 신앙에 눈을 뜸.
3. 나쁜 데 빠져 있다가 착하고 바른길로 돌아온 마음.
한마디로 인간이 능동적으로 행하는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을 가리켜 ‘사도 바울의 회심장’이라고 합니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사울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의 삶을 사로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소명 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여하튼 기세와 살기로 가득찬 사울이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 주께서 하늘의 소리와 밝은 빛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십니다.
3-4절입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홀연히’라는 단어는 ‘갑자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쏟어지더니, 그 빛이 사울을 휘감았습니다.
그 빛의 기운이 얼마나 강했던지 땅바닥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사울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당신이 누구시냐고 묻습니다. 그 때 빛 가운데서 음성이 들립니다.
5절입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시어,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돌아가셨다가 사흘만에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빛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빛은 정오에 다메섹에 내리쬐는 태양빛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었습니다.
그 빛 되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생은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빛 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본 후 눈은 떳으나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자신의 삶이 예수님 없는 영적 소경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8-9절입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울에게 이 3일이라는 시간은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만 살아가려는 전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진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해 치유와 사명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15-16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손을 붙잡고 걷는 것이 어떻게 최선의 길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앞길을 밝히시는 참 빛이시오,
우리 심령의 어둠을 물리치는 생명의 빛 이시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보게 하는 진리의 빛이시기에 가능한 줄 믿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 길목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하여 계십니다.
사울을 만나 주셨던 예수님의 빛, 생명의 빛, 진리의 빛, 사랑의 빛이 지금 우리 예배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감싸고 계십니다.
그 빛이 사울을 부르시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듯 우리를 부르셔서 말씀을 듣게 하시고 세상속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번 한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걸어가시길 바라며,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