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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능력으로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

by 행복두드림 2023. 3. 13.

사도행전3:1-10절

능력으로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

 

우리나라 속담에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의 실체가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긴 하지만 결코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가령 진열대에 때깔도 좋고 먹음직스러운 떡들이 진열되어 있는 광경을 연상해 보십시오. 주머니에 돈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 그 떡을 사 먹을 수 있기에 그 떡은 실재적인 떡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허기가 졌음에도 주머니에 그 떡을 사 먹을만한 돈이 없다면 그에게 그 떡은 불행이도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떡이 실재로 앞에 있음에도 그 떡을 그림의 떡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참함을 스스로 확인하는 시간이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겠습니까!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만나게 됩니다.

 

1-2절입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제 구시란 오늘날 시간으로 오후 3시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침 9, 12, 오후 3, 이렇게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새날의 기준을 해가 뜨는 시각이 아니라 해가 지는 시각에 두었으므로, 오후 3시라면 해가 지기 전 그날의 마지막 기도 시간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의 마지막 기도 시간에 맞춰 성전을 찾았다는 것은, 계속 이어지는 사도행전의 내용을 보건대,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도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의 문들 가운데 니카노르 문을 이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문을 가리켜 미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문들 가운데 그 문이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에 미문이라 불려졌던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그 문을 직접 목격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높이가 23미터에 달하는 미문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금과 은을 입힌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중문이어서 웅장하고 장엄하기 그지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아름다운 미문 앞에 태어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가 그곳에 나와 날마다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곳을 구걸 장소로 택한 것은 미문은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 안 첫 장소인 여인의 뜰로 통하는 출입구이기에 평소 통행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22절은 그의 나이가 40여 세였음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날마다 성전 문에 나와 구걸하는 이 사람을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메고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그를 메어다가 그곳에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앉은뱅이를 앵벌이의 도구로 삼아 자기 이들을 취하는 불량배들이었는지, 아니면 앉은뱅이의 가족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그 앉은뱅이를 성전 안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미문 앞에서 구걸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삶의 출발점인 동시에 목적지일 정도로 유대인과 성전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앉은뱅이는 생명과도 같은 성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미문 앞에 내려놓고 구걸하게만 할 뿐 누구도 그를 성전 안으로 데려다 주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40년 동안 성전 미문을 넘어 성전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성전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떡으로 여겼던 성전 안으로 불쌍한 앉은뱅이에게 대 반전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8절입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무려 40여 년간 단 한 번도 일어서 본 적도 없던 그가 일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동안 그림의 떡으로만 여겨졌던 미문과 성전이 실제적인 미문이 되고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 순간 그가 누렸을 감격과 감동이 얼마나 컸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극적인 대 반전의 사건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6-7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따라하겠습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도구 삼아 당신의 생명과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친히 일으켜 세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인 그가 미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단순히 미문과 성전이라는 건물을 통과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그 어떤 금은 보화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1:7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금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줄 수 있는 것이 많은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딤전 2: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프란시스(Saint Francis)는 무소유로 걸식하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단체를 만들기 위해서 교황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프란시스가 하는 일을 아주 우습게 보았습니다.

 

교황은 프란시스에게 보화가 가득한 창고를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이제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그러자 프란시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칠 능력도 잃어버렸습니다.”

 

교황은 은과 금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보화보다 예수의 이름이 더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올 한해 하나님 나라를 아름답게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어느 때에 베드로를 통해 임했는가?입니다.

3-5절입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서두에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늘 상 미문을 지나 성전에 들어가 기도했던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미문에 나와 구걸하는 앉은뱅이도 처음이 아니라 늘 상 그 곳에서 구걸을 했습니다.

그러니 서로는 일면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닐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요한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요?

위로부터 임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베드로와 요한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전에 들어가는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 되심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영혼구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 역시 대상자였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외칩니다.

우리를 보라외칩니다.

성령의 역사는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냥 지나쳐 갔던 그들의 삶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영혼을 마주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연약한 자도, 배움의 지식이 없는 자도, 가난한 자도, 나이가 많거나 적어도 차별하지 않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듣고 반응해야 합니다.

오늘 앉은뱅이는 우리를 보라는 제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고 바라보거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충만함을 입은 베드로와 요한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복음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앉은뱅이가 일어나 미문과 성전으로 들어가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전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슬픈자가 위로받고, 죽을자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손을 내미는 삶이 전도의 삶입니다.

 

이번 한주간도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시선을 고정 시키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